[서울 여행 및 체험활동 코스 추천] 대학로 거리에서 보는 근대 문화 유산, 그리고 마로니에 공원 - 1 서울대학병원_구 경성제국대학, 대한의원

2015. 9. 24. 23:48서울 여행 및 체험활동/종로-대학로/창신동/동대문시장

[서울 여행 및 체험활동 코스 추천] 대학로 거리에서 보는 근대 문화 유산, 그리고 마로니에 공원

- 1 서울대학병원_구 경성제국대학, 대한의원

 

 

   

역마살, 어쩔 수 없나보다. 9, 시원한 가을 바람에 아침 일찍 부터 집을 나선다. 그렇다고 멀리 가진 않는다. 그냥 지하철타고 가까운 곳으로 떠난다.

도착한 곳은 '대학로'대학로 근대 거리가 있다는 말에 나름대로 코스를 정해 여행을 즐긴다.

 

 

 

1. 구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건물

 

 

 

 

 

 

   

처음 방문한 곳이 서울대병원건물이다. 안쪽에는 최신식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지만 대학로는 따라서는 무언가 고풍스런 멋이난다.

 

정문 앞으로 보이는 의과대학병원이 그렇다. 현대적인 느낌이라기 보다는 조선 후기나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건물과 같은 느낌이다.

 

이 의과대학 건물은 옛 '경성제국대학교 의학부' 건물이다. 당시 일본의 총독부의 추진으로 만들어진 경성제국대학교 여러 건물 중 남아있는 몇 안되는 것이다.

 

 

당시 일본이 우리를 위해 대학을 만들어준다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대학이 만들어진 사유는 당시 조선의 조선민 교육에 대한 움직임때문이었다. 이상재(李商在)를 비롯한 여러 지식인들이 조선민을 위한 민립대학의 필요성을 제창하면서 전국적인 모금 운동을 진행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총독부를 이를 막기 위해 1925년 경성제국대학 관제를 공포하게 된 것이다. 당시 무단 통치에 대한 반감이 커지자 결국 일본도 정책을 바꾸어 조선인도 일본인과 같은 동화정책을 피기 위함이었다. 물론, 고등 교육 정책에서 한국인을 위하는 것처럼 보일 뿐, 실제로는 일본인 학생 수가 더 많았다.

 

 

1924년 초기 중등학교 졸업자들을 대상으로 한 2년제 예과(豫科)가 개교되었고, 1926년에 3년제의 법문학부와 4년제의 의학부가 설치되었다. 총장도 내국인이 아니라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었다. 1927년 의학부 별관과 의학부 본관을 준공하였다. 의학부가 만들어진 후 총독부의원은 부속 의원이 되었다. 의학부 교육은 미국이나 영국식 교육이 아니라 독일계 의술이 가르쳐졌다.

 

 

그렇다면 일제가 법문학부와 의학부를 먼저 설치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과들이 식민지 개발에 있어서 이익이 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공학부를 두지 않음으로서 조선인들에게 과학이나 고등기술 가르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공학부는 제2차 세계대전의 필요성에 의해 1938년에야 만들어지게 되었다.

 

 

 

물론, 이곳을 졸업한 학생들이 친일 활동의 중심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31년 법과 학생들은 반제국주의 운동을 추진하여 예과 학생들의 비밀결사인 독서회 학생들을 포섭하여 반제부도 결성하였다.

 

 

 

 

 

 

 

 

 

 

지금은 로비 입구로 되어 있는 돔형의 정문 구역은 당시에는 호텔처럼 된 구조로 차가 안쪽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 황토색 빛을 내는 벽돌로 쌓여진 건물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황토색 벽돌을 쌓아 만든 것이 아니라 벽돌모양의 황토 색 판을 붙인 것이다. 자세히 보면 빛살무늬 토기처럼 수직의 무늬를 넣기까지 했다. 벽돌을 쌓아서 만드는 것보다 더 힘든 작업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섬세하다.

 

 

 

 

 

 

 

 

 

 

 

 

 

 

 

 

2. 우리나라 최고의 병원, 서울대학교 병원

 

 

 

 

 

 

 

 

 

 

 

 

 

 

 

 

 

   

3. 구 대한의원

 

 

 

 

 

 

 

 

 

 

 

 

 

 

 

 

 

 

 

서울대학병원 본관 앞, 현대식 건물 앞에 2층의 붉은 벽돌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그 기풍은 10층이 넘는 고층 병원 건물보다 더 위용이 넘친다. 현재 서울대학교병원 부설 별원연구소 건물로 사용되고 있는 이 건물은 옛 '대한의원'이었다. 사적 제248. 지정면적 5,091의 대한의원(大韓醫院)1907년 내부(內部) 소관의 서양식 병원이었던 광제원(廣濟院)과 궁내부 소속의 적십자병원, 학부의 경성의학부를 통합하여 설립한 대한제국시대 최고의 국립의료기관이었다. 의정부 직속으로 운영되었고, 그 편제는 치료부(治療部의육부(醫育部위생시험부(衛生試驗部)로 구성되었다.

 

 

당시, 1907년 대한제국 정부가 칙령 제9호에 의해 창경궁의 외원(外苑)이던 함춘원(含春苑)의 마두산(馬頭山) 언덕에 세워졌었다. 탁지부의 일본인 기술자의 설계로, 대지면적 134970위에 1907년 착공되었고, 축조 당시는 병동과 부검실, 그리고 의학교 등이 함께 지어졌었다. 물론 지금은 본관건물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1908년 대한의원의 관제(官制)가 개정되면서 대한의원은 조선총독부의원으로 이름이 변경되었고, 다시 1911년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로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이 당시 영희전(永禧殿) 자리에 병원의 대지가 178200으로 확대되었다. 19121913년의 증축공사를 거쳐 1926년 경성제국대학에 편입되면서 대학병원으로 되었다.

 

 

건물의 구조는 지상 2(시계탑 포함 지상 4)인 조적식(組積式)으로, 총면적이 1, 686.87으로 좌우 대칭형이다. 물론, 이후 증축되면 대칭형 구조는 약간 변경되었다. 출입문은 본관 남북쪽에 두 개가 있으며, 건물 전체를 분할하는 복도는 동쪽에 증축된 부속가옥까지 연결되었다. 본관의 평면구성은 현재 1층의 경우 전열 6, 후열 8실로 되어 있고, 2층은 전열 5, 후열 7실로 이루어져 있었다.

 

 

시계탑은 상부와 하부로 구성되었는데 하부는 적벽돌 벽면과 코너의 장식기둥으로 단순하게 처리되었으며 상부는 둥근 지붕을 중심으로 화려한 장식으로 처리하였다. 이러한 장식은 17~18세기 유럽의 네오바로크(Neo Baroque)풍 시계탑의 주요한 형태요소이다. 현관 포치(porch : 건물 입구에 지붕을 갖추어 만든 구조물)는 석조 아치형 개구부로 되어 있으며 자동차가 직접 진입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일제 감정기에는 총독부 의원이 되었고, 1926년에는 의학강습소가 경성대학교로 편입되었다. 광복 후에는 서울대학교 부속 병원이 된 이후로도 몇 차례가 그 용도가 변경되었다. 북한군 병원에서 미 공군 전용 병원으로, 이후 서울대 병원으로 사용되다가 병원 연구소로 쓰였으며, 지금은 의학박물관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1979년 서울대병원 신관이 조성되면서 본관 건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철거되었다. 1981년 보수 공사를 하였다. 이 공사 이후 평면 구성은 많이 변경되었다. 기초부분의 외벽은 지표면에 대하여 약 30정도 높은 지대석이 설치되었다. 벽체의 단면은 구조적 안정성을 고려하여 외벽과 내벽, 그리고 하벽과 상벽을 구분하여 벽 두께가 다르게 구축되어 있다. 본관의 지붕틀은 일반적으로 서양식 건물에서 많이 쓰이는 왕대공 지붕틀로 되어 있다.

 

 

 

 

 

 

 

 

 

 

 

 

 

 

 

 

 

 

 

 

 

 

 

 

 

 

 

 

 

 

 

 

 

 

 

 

 

 

 

 

 

 

 

 

 

 

 

 

4. 암센터에서 보는 창경궁

 

 

 

 

 

 

 

 

 

 

 

 

서울대병원에서 꺼리지는 장소인 암센터로 이동을 한다. 정확한 명칭은 암센터가 아니라 암병원이다. 최신식 시설이지만 ''이라는 어두운 질병 이름에 한걸음 한걸음이 망설여진다. 아무튼 건물에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에 오른다. 암병원 옥상이라니? 참 아이러니 하다. 최신식 건물에서 무슨 문화유적을 볼 수 있다는 말인가? 옥상에 도착하니 먼저 현대식 옥상 정원이 눈에 들어온다. 옥상 정원에 벤치에는 사람들이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벤치 가까이 가서 건물 아래를 바라보니 진풍경이 펼쳐진다.

 

 

그건, 현대의 풍경이 아니라 과거의 풍경이다. 바로 조선의 모습이 펼쳐진다. 조선 5대 궁궐 중 하나인 창경궁이 한 눈에 들어온다. 서울에 이런 공간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500년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로 여행을 온듯한 느낌이다. 정문인 홍화문부터 건물 하나하나가 마음에 가까이 와닿는다. 왕실에 들어온 것처럼 이곳에서 조차 숙연해진다.

 

 

 

 

 

 

 

 

 

 

 

 

 

 

5. 경모궁지_대학병원의 확장과 근대유산 사이

 

 

 

 

 

 

대학병원에서 조금 내려오다보면 병원 좁은 골목길을 들어오다보면 빈 공터 하나가 있다. 초 가을이지만 푸른 빛의 잡초가 무성하다. 이 터에는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철조망으로 벽을 만들어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있다. 멀리 보이는 돌 계단과 주춧돌이 이곳에 과거 문화유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이곳은 경모궁지다.

 

 

동국여지비고에는 창경궁의 동쪽, 경희궁 개양문의 남쪽 등에 있는 궁궐의 정원 이름이 함춘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함춘원은 성종 15(1484)에 창경궁을 창건하고, 이곳에 나무를 심고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성종 24(1493) 년에 정식으로 그 이름이 붙여졌다. 연산군 당시에는 함춘원 밖으로도 더욱 확대하여 군대를 배치하고 대문도 만들었다. 인조 때는 함춘원의 반 정도를 태복사에 나눠주었다. 인조 때에는 함춘원의 절반을 왕의 거마(車馬)와 조마 같은 것을 맡은 관아(官衙)인 태복사에 주었고, 이후 140여년간 말을 길렀다.

 

영조 40(1764)에는 사도세자의 사당을 이곳으로 옮겨지었고, 정조가 즉위하면서 이곳을 경모궁이라고 칭하였다. 광무 3(1899)에 경모궁에 있던 장조, 즉 사도세자의 위패를 종묘로 옮기면서 경모궁은 그 기능을 잃게 되었다. 이름도 경모궁도에서 경모전으로 바뀌게 되었다. 광무 4(1900) 경모궁 터에는 6성조라 불리는 태조·세조·성종·숙종·영조·순조의 초상을 모시던 영희전을 옮겨 세웠다. 현재는 함춘원은 남아있는 않고 빈 공터로 남아 있으며, 함춘문 하나가 그 역사를 말해준다.

 

 

 

 

 

베짱이 여행가 이두현<두리쌤> 글과 사진